오토 올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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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올렌도르프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장교로, 아인자츠그루펜 D 부대를 지휘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에서 9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1925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SD(친위대 정보부)에서 경제 컨설턴트, RSHA(국가보안본부)의 Amt III (SD-Inland) 책임자를 역임했다. 1941년에는 아인자츠그루펜 D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학살을 자행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의 행위를 옹호했지만, 반인륜적 범죄 및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5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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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올렌도르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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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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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이름 | 오토 올렌도르프 |
출생일 | 1907년 2월 4일 |
출생지 | 호헤네겔젠, 하노버 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사망일 | 1951년 6월 7일 |
사망 장소 | 람스베르크 교도소, 람스베르크암레흐, 서독 |
사망 원인 | 교수형 |
범죄 시작 시기 | 1941년 6월 |
피해자 수 | 90,000명 이상 |
표적 | 슬라브족, 유대인, 로마인, 공산주의자 |
활동 지역 |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 |
체포일 | 1945년 5월 23일 |
재판 정보 | |
재판 | 특수작전집단 재판 |
유죄 판결 | 인도에 반한 죄 전쟁 범죄 범죄 조직 가입 |
형벌 | 사형 |
SS 경력 | |
소속 | 나치 독일 |
군종 | 슈츠슈타펠 |
계급 | SS-집단지도자 |
지휘 | D 특수작전집단 국가보안본부 제3청 |
2. 생애 및 교육
오토 올렌도르프는 독일 제국 하노버의 호에네겔젠(현재는 쇠르데의 일부; 당시에는 프로이센 왕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3][4][5]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6세에 독일 국가 인민당 (DNvp)에 입당했지만, "부르주아 정당"이라는 이유로 당에 적응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나치당과 국가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1925년 18세의 나이로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6531).[5] 1926년에는 SS에 입당했다.[3]
1917년 힐데스하임의 안드레아눔 인문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하고,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했다.[3] 라이프치히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며,[3] 1930년에는 이미 여러 경제 기관에서 강의를 했다. 대학교에서는 법학·국학·경제학 등을 전공했으며 1931년까지 재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아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했다.[4] 1931년 파비아 대학교에서 2학기 장학금을 받았다. 역사학자 앨런 스타인와이스에 따르면, 올렌도르프는 박사 학위 2개를 가진 몇 안 되는 나치 중 한 명이었다. 1933년 킬 세계 경제 연구소 연구 이사직을 얻었으며, 킬과 괴팅겐에서 국가 사회주의 학생 연맹 활동을 하고 베를린의 나치당 학교에서 가르쳤다. SS, 독일 노동 전선, 4년 조직 간의 경제 정책에 대한 주요 토론에도 참여했다. 1938년에는 제국 경제 위원회(Reichswirtschaftskammer|Reich Business Boardde) 무역 부서 관리자가 되었다. 역사학자 크리스티안 인그라우는 올렌도르프에게 나치즘은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인종을 위한 탐구"였으며, 비록 그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게르만 민족에 대한 그의 믿음은 동료 SS 지식인들의 믿음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3. 나치당 및 친위대 경력
오토 올렌도르프는 나치당과 친위대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1925년 18세의 나이로 나치당에 입당하여 초기 활동에 참여했다.
1931년 괴팅겐 대학교 경제학자 교수의 권유로 이탈리아 파비아 대학교로 1년간 유학을 갔으나,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에 공감하지 못하고 훗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의 차이를 역설했다.
1933년 힐데스하임 지방 법원 수습생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 킬 세계 경제 연구소에서 예센 교수의 조수로 일했다. 그러나 1934년 가을, 킬의 나치당 "국가 볼셰비즘" 인사들과의 대립으로 킬에서 쫓겨났다. 같은 해 결혼하여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었다. 1935년 베를린 대학교 경제학 연구소 수석 연구원이 되었다.
1942년 7월 독일로 돌아와 국가 보안 본부 제3국 국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 국가 보안 본부를 직접 지휘하며 올렌도르프를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시키고, SD 업무에 전념하도록 했다. 같은 해, 군수상 알베르트 슈페어에 대한 견제를 위해 올렌도르프를 국가 경제성에 초빙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힘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3년 11월, 올렌도르프는 국가 경제성 차관의 차관 대리로 입성했다. 이는 힘러가 국가 경제성에 영향력을 넓혀 치안 유지를 쉽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힘러, 올렌도르프, 발터 풍크 등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높아진 중간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중간층 보호와 치안 정책을 조합한 "신 항로"를 시작, 슈페어의 군수성과 대립했다. 1944년 올렌도르프는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1945년 5월, 올렌도르프는 힘러의 플렌스부르크 탈출에 참여했다. 1945년 5월 23일 뤼네부르크 근처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었고,[1] 심문 과정에서 동부에서의 독일 캠페인의 범죄적 성격을 드러냈다.[1]
3. 1. 나치당 초기 활동
오토 올렌도르프는 소년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어, 16세 때 독일 국가 인민당(DNvp)에 입당했다. 하지만 이 당은 이른바 "부르주아 정당"이어서 그는 당에 적응하지 못했다. 독일의 전통적인 일반 가정에서 자란 그는 마르크스주의 등의 사상에 경도될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런 가운데 나치당과 국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오토 올렌도르프는 곧 이 사상에 매료되어 1925년, 18세의 나이로 나치당에 입당했다[5] (당원 번호 6531).
3. 2. 친위대 정보부(SD) 활동
올렌도르프는 1936년 SD에 입사하여 경제 컨설턴트가 되었다. 헬무트 크노헨과 프란츠 식스와 같은 다른 학자들처럼 올렌도르프도 SD의 인재 스카우터들에게 발탁되었다.[2] SS-''하우프트슈름퓌러'' 계급으로 SS에 배속된 그는 1939년까지 SS-''슈탄다르텐퓌러'' 계급으로 올랐으며, 국가보안본부(RSHA)의 Amt III (SD-Inland) 책임자로 임명되었다.[3][4] 1945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5] 그는 비밀 경찰 요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는데, 일부 나치 지도자들은 이 역할에 불만을 가졌다. ''Reichsführer-SS'' 하인리히 힘mler은 한때 올렌도르프를 "유머가 없는 참을 수 없는 프로이센 사람"이라고 묘사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렌도르프는 SD의 일원으로서 나치 경제 교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인종적 맥락"에서 경제를 형성하려 했기 때문에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맹렬해"졌다.[6]
SD-Inland의 책임자로서 올렌도르프는 사회, 문화 및 경제 문제를 수집하고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나치 정부의 상사에게 보고서를 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7] 올렌도르프와 SS-소령 Reinhard Höhnde의 관할 아래에 있던 정기적인 여론 조사도 이러한 보고서의 일부를 구성했다.[8] 나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이러한 여론 조사는 인기가 없었고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1937년 예센 교수의 권유로 SD(친위대 정보부)에 입대[1], SDII23(경제부) 부장에 취임했다. 4개년 계획과 발터 다레의 국가 식량 신분단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정책으로 100만에 가까운 중간층의 경영이 위협받게 되자 올렌도르프는 중간층의 보호를 꾀하려 했고, 발터 다레 등과 잠재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힘러에게 다레의 이데올로기는 중요했으므로 올렌도르프의 다레에 대한 반대는 기각되었다.
SS나 SD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올렌도르프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여러 번 SD를 떠날 허가를 얻으려 했다. 허가는 나지 않았지만, 1938년 6월부터는 SD 전속에서 벗어나 새로 국가 상업 집단 업무 집행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올렌도르프는 중간층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 1939년 9월에 하이드리히의 국가 보안 본부가 설립되자 그 제3국(SD 국내 업무) 국장을 맡았다. 국가 상업 집단 업무 집행자의 지위도 계속 유지했다.
3. 3. 아인자츠그루펜 D 부대 지휘
1941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올렌도르프를 아인자츠그루펜 D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1] 이 부대는 남부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에서 활동했다.[1] 아인자츠그루펜에 합류하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은 전망이었고, 올렌도르프는 임명 전에 두 번 거절했다.[1] RSHA에서 아인자츠그루펜으로 이동한 것은 인력 부족과 더불어 올렌도르프, 아르투어 네베, 파울 블로벨과 같이 이미 세부 사항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기 살해 작전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1] 아인자츠그루펜 D는 가장 작은 규모의 부대였지만, 베사라비아, 남부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살해 현장을 통과하는 동안 루마니아인들이 보충했다.[1] 아인자츠그루펜 D에 대한 추가 인력은 우크라이나 보조 경찰 부대에서 나왔다.[1] 군사 작전을 지원하는 올렌도르프의 부대는 제11군에 배속되었다.[1] 올렌도르프의 아인자츠그루펜은 특히 1941년 12월 13일 심페로폴에서 발생한 학살의 책임이 있었는데, 이 학살로 최소 14,300명, 대부분 유대인이 사망했다.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에서 9만 명 이상의 살인이 올렌도르프 부대에 기인한다.[1]
올렌도르프는 Genickschußde(목 뒤로의 총격)의 사용을 싫어했고, 개인적인 살인에 대한 책임을 덜기 위해 희생자들을 줄 세워 더 먼 거리에서 총격을 가하는 것을 선호했다.[1] 사격 부대와 희생자 간의 모든 형태의 접촉은 올렌도르프의 주장에 따라 살해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제한되었으며, 총격을 받을 각 사람에게 최대 3명의 사수가 할당되었다.[1] 집단 살해 정신을 보장하기 위해 올렌도르프는 부대원들의 개별적인 행동을 금지했고, 희생자의 귀중품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지시했다.[1]
많은 살해 작전은 올렌도르프가 직접 감독했는데, 그는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 군사적 성격을 띠고 인도적"이기를 원했다.[1] 1941년 8월 1일, 올렌도르프를 포함한 아인자츠그루펜 사령관들은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로부터 본부(히틀러를 특히 포함)에게 동부에서의 진행 상황을 알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뮐러는 또한 이러한 작전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진을 신속하게 전달하도록 장려했다.[1] 1941년 9월, 올렌도르프의 부대는 오데사의 흑해 항구 근처 미콜라이우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22,467명을 학살했다.[1]
국방군(Wehrmacht)은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이 군사 작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올렌도르프는 1941년 10월에 유대인 농부 중 일부를 죽이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군의 요청을 받았다.[1] 그는 이 요청을 존중했지만, 힘러의 경멸을 받았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한 달 전인 1941년 9월, 올렌도르프는 부하들에게 "지금부터 유대인 문제는 해결될 것이며, 이는 청산을 의미한다"라고 발표했다.[1] 그 달부터, 아인자츠그루펜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까지 체계적으로 총살하는 과정을 시작했다.[1]
1942년 2월과 3월 사이에 힘러는 남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스 차량을 사용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살해하도록 명령했지만, 올렌도르프는 많은 아인자츠코만도가 희생자들을 매장하는 것이 그 후 "고난"임을 증명했기 때문에 차량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보고했다.[1] 가스 차량 살해 작전은 일반적으로 인구가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지 못하도록 밤에 수행되었다.[1] 희생자들이 사망한 후, 유대인 존더코만도de는 시체를 내리고, 차량의 가스실 내부의 배설물을 청소해야 했으며, 청소가 완료되면 즉시 총살되었다.[1] 올렌도르프에게 가스 차량은 힘러가 요구한 살해 규모, 즉 한 번에 15~25명만 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실용적이었다.[1]
올렌도르프는 나치 대의에 헌신했기 때문에 동료들보다 더 오랫동안 우크라이나에 머물렀으며, 독일이 향하고 있는 정치적 방향을 싫어했을지 모르지만 유대인 학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적은 없었다.[1] 그러나 그는 살인 임무를 수행하는 아인자츠그루펜을 동반한 루마니아 부대가 저지르는 야만성과 가학성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는데, 그들은 시체를 남길 뿐만 아니라 약탈과 강간도 저질렀기 때문이다.[1] 그는 또한 루마니아인들이 일할 수 없는 허약한 노인과 어린이 수천 명을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서 독일이 점령한 지역으로 몰아내고, 올렌도르프의 부대는 그들을 루마니아 영토로 강제로 되돌려 보냈지만, 그 결과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불평했다.[1]
3. 4. 제국 경제부 활동
1938년 6월부터 올렌도르프는 SD 전속에서 벗어나 국가 상업 집단 업무 집행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올렌도르프는 중간층 보호 정책을 추진했다. 1939년 9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국가 보안 본부가 설립되자 그 제3국(SD 국내 업무) 국장을 맡았으며,[6] 국가 상업 집단 업무 집행자 지위도 계속 유지했다.
1942년 7월 독일로 돌아와 다시 국가 보안 본부 제3국 국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이후 직접 국가 보안 본부를 지휘하게 되었고, 올렌도르프를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국가 상업 집단 업무 집행자를 사임하고 SD 임무에 전념할 것을 명령했다. 같은 해, 국가 경제성 차관은 군수상 알베르트 슈페어에 대한 견제로서 친위대의 거물이자 경제에도 정통한 올렌도르프를 국가 경제성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시도는 힘러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결국 1943년 11월 올렌도르프는 국가 경제성 차관의 차관 대리로 입성하게 되었다. 이는 1943년 8월 내무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힘러가 국가 경제성에도 영향력을 넓혀 치안 유지를 쉽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후 힘러, 올렌도르프, 발터 풍크 등 친위대와 국가 경제성 간부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격렬해진 인적 동원이나 조업 중단 등으로 높아진 중간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중간층 보호와 치안 정책을 조합한 "신 항로"를 시작하여 잠재적으로 슈페어의 군수성과 대립하게 되었다. 1944년에 올렌도르프는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5월 23일, 카를 되니츠 정권에서 근무하던 중 연합군에 체포되었다. 올렌도르프는 1945년 11월 선서 진술에서 "내가 아인자츠그루펜 D의 사령관이었을 때 약 9만 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숙청되었다"라고 혐의를 인정하는 듯한 진술을 했다. 하지만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에서는 혐의를 부인했다.[8]
올렌도르프의 기소장에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임무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뒤에서 유대인, 집시, 소련 활동가, 인종적으로 무가치하거나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민간 주민 분자를 근절하는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올렌도르프는 "아인자츠그루펜에 인종을 이유로 한 살육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치안 유지였다. 치안 유지를 위협하는 자에 대처해야 할 것을 명령받았을 뿐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 당시에는 동부 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브루노 슈트레켄바흐에게 유대인 학살 책임을 씌우는 듯한 증언을 했다.[8]
그러나 판사들은 올렌도르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1948년 4월 10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후 1951년 6월 7일 란츠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8]
4. 1. 전범 재판
올렌도르프는 1946년 1월 3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주요 피고인이 되었으며, 다른 기소된 전쟁 범죄자들을 기소하는 데 중요한 증인이기도 했다. 올렌도르프의 겉보기에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은 나치 독일의 부패에 대한 혐오감과 굳건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다. 법정은 특히 아인자츠그루펜의 작전에 대해 올렌도르프를 심문했다.[8] 재판에서 올렌도르프는 충성스러운 나치로서 적절하게 행동했고 잘못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를 표명하지 않았으며, 유대인이었던 검사 벤 페렌츠에게 나중에 페렌츠가 한 일에 대해 유대인들이 고통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살해당하는 사람들보다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도덕적 고통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올렌도르프는 소련 지역에서의 아인자츠그루펜 작전을 "모든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한 인종주의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새로 획득한 영토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청산 명령"으로 제시하려 했다.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면서 올렌도르프는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을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적 제거와 비교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사격 부대가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버튼 누르기 살인자'보다 더 나쁘지 않다"고 주장했다.
올렌도르프는 연합국에 대한 만행과 도덕적 등가성을 확립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 및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48년 4월 사형을 선고받았고, 3년 동안 구금된 후 1951년 6월 7일 바이에른의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8]
4. 2. 사형 집행
1945년 5월 23일, 카를 되니츠 정권에서 근무하던 중 연합군에 체포되었다. 오토 올렌도르프는 1945년 11월 선서 진술에서 "내가 아인자츠그루펜 D의 사령관이었을 때 약 9만 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숙청되었다"라고 혐의를 인정하는 듯한 진술을 했다. 그러나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에서는 혐의를 부인했다.오토 올렌도르프의 기소장에는 "아인자츠그루펜의 임무는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뒤에서 유대인, 집시, 소련 활동가, 인종적으로 무가치하거나 정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민간 주민 분자를 근절하는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오토 올렌도르프는 "아인자츠그루펜에 인종을 이유로 한 살육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치안 유지였다. 치안 유지를 위협하는 자에 대처해야 할 것을 명령받았을 뿐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 당시에는 동부 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던 브루노 슈트레켄바흐에게 유대인 학살 책임을 씌우는 듯한 증언을 했다.[8]
판사들은 오토 올렌도르프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토 올렌도르프는 1948년 4월 10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51년 6월 7일 란츠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참조
[1]
서적
アングラオ(2012年)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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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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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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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アングラオ(2012年)
[8]
서적
アングラオ(20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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